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몇 해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살던 곳과 아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어중간한 곳에 문득 떨어졌다. 일과 사람과 상황, 아무튼 모든 일정과 동선이 흐트러진 탓이었다. 익숙한 듯도 낯선 듯도 한 시외버스 정류장에 혼자 우두커니 서서 어서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줄 버스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기다리는 마음은 아랑곳없이, 도시 외곽을 빙 둘러 오는 버스의 배차 간격은 보통이 아니었다. 평일 오후이니 더 그랬다. 마침 무선 이어폰 충전도 바닥났다. 무선 이어폰이란 하나같이 중요한 때마다 왜들 그러는 걸까. 이 광활한 세계에 혼자만 남은 기분이었다.
갑자기 숨을 쉬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의미를 두고 한 생각은 아니었다. 숨이야 당연히 쉬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꼬인 일정도, 기다리는 버스도, 광활한 세계도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숨을 쉬어 보고 싶었다. 숨을 쉬었다. 쉴 수 있는 한 가장 크게. 둥글 대로 둥글어져 거북이도 인사하고 갈만한 등이 뻐근했다. 움츠렸던 갈비뼈도 우두둑 소리를 냈다. 긴 겨울을 뒤로 하고 볕과 바람에 따스한 기운이 조금씩 스며들던 즈음이었다. 한 번 더 크게 숨을 쉬었다. 온몸 구석구석 새 계절의 공기가 가득 찼다. 이렇게 ‘숨’을 ‘쉬어’ 본 게 언제였나, 잠시 아득한 기분이었다.
그때 밴드 12BH (원투비하이)의 [Take a Breath]가 함께였다면 어땠을까. 일부러 그런 순간을 떠올리지 않아도, 벌써 이 밴드와 그런 관계를 오래 맺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12BH는 2023년 발표한 첫 싱글 ‘Green’부터 꾸준히 도시의 빠듯한 일상 속 문득 생긴 틈을 파고든 포근한 휴식을 노래해 왔다. 몰래 숨어든 만큼, 그들의 음악에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정 온도가 늘 함께했다. 멀리 떠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안전한 해안가, 가장 보드라운 파도가 치는 곳에서 바다 거품에 밀려온 감정의 작은 조각에 돋보기를 들이대 한참을 바라보며 그렇게 내내 출렁였다.
[Take a Breath]는 12BH가 타고난 그 ‘적당한 출렁임’의 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엷은 빛이 겹겹이 어른거리는 그곳에 먹빛 가정이 한 방울 똑, 떨어진다.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의 방향을 단번에 바꿔버릴, ‘만약에’다. 만약에 신발 끈이 풀려 함께 달리던 당신을 놓쳐 버린다면, 만약에 길을 잃어버린다면, 만약에 곧 출발할 이 기차를 타 버린다면. 부사 하나로 완전히 뒤바뀌어 버릴 풍경을 눈앞에 두고 12BH는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느긋하게 노래한다. 보사노바 리듬이 봄볕처럼 기분 좋은 첫 곡 ‘Brim’, 인디팝의 사랑스러움을 추가 토핑처럼 아낌없이 올린 ‘Lose My Way’, 밴드 특유의 소박한 유쾌함이 어린 ‘Better Days’를 쭉 이어 듣다 보면 ‘설마 무슨 일 있겠어?’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그렇게 말랑한 마음이 무장 해제되는 순간, 타이틀곡 ‘Golden Fish’와 ‘Burn’이 등장한다. 진한 밴드 사운드가 돋보이는 ‘Golden Fish’는 같은 곳에만 영원히 머물러 있지는 않겠다는 이들만의 평화롭지만 당찬 독립 선언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아닌, 모든 게 지나가고 난 뒤 남은 잿더미를 고요히 응시하는 ‘Burn’도 전에 없던 도전이긴 마찬가지다. 온통 흔들리는 시선과 감정, 소리 속에서 12BH는 듣는 이에게 다시 한번 ‘만약에’를 던진다. 만약에 삶이 15분 일찍 시작한 영화라면, 한 걸음 앞선 곳에서 아직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걸까.
짧지 않은 시간 벼려졌음이 분명한 꽤 견고해 보이는 질문들 앞에 마지막 곡 ‘Train’이 선택지를 건넨다.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나겠다는 명확한 선택의 제언이 부담이나 압박으로 다가오지 않는 건, 12BH 음악이 가진 태생적 여유로움 덕이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문득 찾아온 손님처럼, 이들은 수많은 선택지와 질문을 앞에 두고도 한없이 너그러웠다. ‘이런 선택도 있고, 저런 선택도 있겠지. 너의 지금은 어때? 아, 우선 크게 숨 한 번 쉬어’. 12BH가 만들어내는 낭만 어린 사운드와 영어로 된 노랫말은 어쩌면 이들이 품은 고민과 헤맴을 적당히 모른 척 해주는 속 깊은 단짝친구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두 눈을 꾹 감고 친구가 건넨 사탕을 삼킨다. 예상치 못한 순간 찾아온 일상의 생경한 감각이 뾰족하게 날을 세운다. 숨을 멈췄다가 다시 크게 내쉰다. 안정된 호흡과 달콤한 끝맛이 남는다. 남은 오늘을 살아갈 힘이 조금 난다. 역시, 그곳에 [Take a Breath]가 함께여도 좋을 것이다.
김윤하 / 대중음악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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